1952년,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는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걸작 살다(Ikiru)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순한 휴먼 드라마를 넘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보편적 질문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도쿄 시청에서 30년간 근속한 중년의 공무원이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서류 결재와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남은 시간이 1년도 채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단순히 한 남자의 사망기를 기록하는 대신, 그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는지를 집중적으로 그린다. 살다는 일본 전후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절묘하게 병치하며, 관객이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게 만든다. 구로사와의 연출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있으나, 프레임 속 모든 요소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상징적 미장센, 인물 배치, 카메라 움직임은 와타나베의 내적 변화와 영화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개봉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는 이야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세대를 넘어 공감을 이끌어낸다.
삶: 무기력에서 깨어나다
영화의 시작에서 와타나베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서류에 도장을 찍고, 결정을 미루며, 민원을 다른 부서로 돌리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구로사와는 이런 관료주의적 무기력을,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두는 롱숏과 무채색에 가까운 톤으로 표현한다. 사무실의 어둡고 답답한 조명, 반복되는 타이핑 소리, 서류 더미는 그의 삶을 옭아맨 굴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병원에서 ‘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는 순간, 와타나베의 일상은 완전히 뒤집힌다. 처음에는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가 밤거리를 방황하며 마주하는 네온사인과 시끄러운 음악은, 현실을 잊으려는 시도의 일환이지만, 구로사와는 이를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카메라는 군중 속 고독한 그의 표정을 집요하게 포착하며, 물리적 소음 속에서도 내면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낸다. 이 시기의 전환점은 젊은 여성 동료 도요와의 우연한 만남이다. 도요는 사표를 내고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만든다’고 말하는 순간, 와타나베는 번쩍 깨닫는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 제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는 이때 ‘남은 시간을 타인을 위해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후 그는 어린이 놀이터 건설을 목표로 세우고, 그동안 회피했던 민원 해결을 직접 나선다. 상사와 동료들의 무관심, 부서 간의 책임 떠넘기기, 예산 부족 등 수많은 장벽이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와타나베는 마침내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며,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구로사와는 이러한 변화를 카메라 워크로 명확히 보여준다. 초반의 정적이고 고정된 숏이, 후반으로 갈수록 더 많은 이동과 근접 촬영으로 바뀌며, 그의 내적 활력을 시각화한다.
죽음: 두려움에서 수용으로
죽음은 살다의 중심축이다. 와타나베가 위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삶의 빛을 잃은 듯 보인다. 의사의 말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다른 환자들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이는 죽음이 언제나 불시에,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다가옴을 상징한다. 처음에 그는 죽음을 피하려 한다. 술, 유흥, 낯선 여자와의 하루 등, 가능한 모든 쾌락을 추구하지만, 이는 모두 순간적인 회피일 뿐이었다. 그가 죽음을 진정으로 수용하게 되는 계기는 놀이터 건설의 완성이다. 특히 눈 내리는 밤, 완성된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곤도라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았다. 와타나베의 표정에는 공포가 아닌 평온이 깃들어 있다. 카메라는 그를 중심에 두고 천천히 줌인하며, 그의 호흡과 눈빛에 담긴 안도감을 강조한다. 놀이터의 환한 조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가운데, 하얀 눈송이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이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삶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의 상태를 은유한다. 구로사와는 이 장면을 통해 죽음과 삶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다는 철학을 전한다.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의미를 지켜내는 것이다. 와타나베가 보여주는 평온함은 단순한 종말의 수용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의 마무리에 대한 만족이다. 그가 남긴 놀이터는 곧 그의 존재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웃음과 생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는 죽음을 ‘끝’이 아닌 ‘연결’로 해석하게 만든다.
의미: 한 사람의 행동이 남기는 흔적
마지막 장례식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와타나베의 관 속에는 놀이터 건설에 관한 서류와 사진이 함께 들어 있다. 동료들은 그의 마지막 행보를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의 결단을 ‘죽음을 앞두고 좋은 일을 해보고 싶었던’ 일회성 행동으로 치부한다. 일부는 그가 끝까지 싸운 이유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그 상황이었다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허세를 부린다. 이 장면은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의 변화가 얼마나 쉽게 희석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구로사와는 동시에 한 사람의 행동이 지역 사회에 얼마나 지속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놀이터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 웃고 뛰어노는 장소가 되었고, 이는 와타나베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촬영적으로도 마지막 파트는 초반과 확연히 다르다. 처음의 사무실 장면은 정적인 구도로 관료제의 경직성을 표현했지만, 장례식 회상 장면에서는 더 많은 핸드헬드와 자연광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감정과 변화된 분위기를 포착한다. 이 대비는 와타나베의 행동이 공동체에 남긴 ‘보이지 않는 공기’의 변화를 은유한다. 비록 동료들이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을 완성했고, 그 흔적은 계속 남아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실려 퍼져나간다. 의미 있는 삶이란 반드시 거대한 업적이 아니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남기는 것임을 영화는 명확히 보여준다.
결론: 다시 보는 구로사와의 인간 탐구
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보여준 인간 탐구의 정점 중 하나다. 무기력한 관료였던 와타나베는 위암 선고라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는 타인을 위한 놀이터 건설이라는 목표를 통해 ‘살아있음’을 되찾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조차 평온하게 받아들였다. 구로사와는 절제된 미장센과 상징적 장면, 인물의 시선과 표정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이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당신은 지금 진정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답은 영화 속 와타나베처럼,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에 달려 있다. 살다는 그 답을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반드시 다시 봐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