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키루(生きる)*는 일본 영화사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작품이다. ‘살아간다’는 뜻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단지 생물학적 생존이 아닌,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암 선고를 받은 한 중년 공무원이 죽음을 앞두고 처음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이 작품은 삶의 목적, 개인의 주체성, 죽음에 대한 인식 등 철학적 주제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본 글에서는 이키루를 중심으로, 인간 존재론의 핵심 질문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인간의 초상
이키루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도쿄 시청에서 30년 넘게 근무해온 공무원이다. 그는 ‘모범적인’ 직장인이지만, 영화 초반부터 관객은 그가 생명력을 잃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반복되는 서류 작업, 상명하달의 조직 문화, 그리고 눈치 보기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그는 말 그대로 ‘살고 있지만 살지 않는’ 인간이다. 그의 삶에는 감정도, 열정도, 목적도 없다. 그러던 중 그는 병원을 찾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된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직면한 와타나베는 충격과 공포 속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실존주의적 전개를 시작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핵심이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말했는데, 와타나베는 이 죽음을 계기로 삶의 본질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가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방탕한 유흥을 시도하고, 젊은 여성 직원을 따라다니며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으려 애쓰지만, 그것이 공허한 회피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는 점차 쾌락이 아닌 사회적 기여, 남을 위한 실천,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캐릭터의 성장이라기보다, 존재론적 각성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죽음을 통한 삶의 재정의
이키루는 철저히 죽음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와타나베는 병을 통해 “시간이 유한하다”는 진리를 체감하며, 더 이상 무의미한 생존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구로사와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단지 비극적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존재를 재정의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그는 관료주의로 인해 무시되었던 민원 오염된 도심 하수구 자리에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을 다시 꺼내 든다. 동료 공무원들이 모두 기피하던 그 일에 와타나베는 전력을 다해 뛰어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련 부처를 설득하고 서류를 처리하며, 마침내 놀이터를 만들어낸다. 이 놀이터는 단순한 ‘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와타나베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맞이하려는 행동적 철학의 상징물이다. 그는 죽기 직전, 겨울밤 그네에 앉아 ‘생명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은 일본 영화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무기력했던 중년 남성이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삶의 의미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와타나베의 장례식과 동료들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관객은 그의 행동이 동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관찰하게 된다. 일부는 감동받아 그를 본받겠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며칠 내 원래의 시스템으로 되돌아간다. 구로사와는 이 장면을 통해, 사회 시스템의 관성, 인간의 변화를 둘러싼 현실적 한계를 지적하며, 진정한 변화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놀이터를 남겼고, 그것을 통해 한 아이의 웃음을 남겼다. 이 장면은 마치 톨스토이가 말한 “죽음 앞에서도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믿음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철학적 연출
구로사와 감독은 이키루를 통해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사유를 영화적으로 구현한 대가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 전달을 넘어, 영화의 형식과 스타일을 통해 철학을 드러낸다. 흑백 필름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의 극명한 대비를 시각적으로 강화하고, 잦은 클로즈업은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활용된다. 또한 영화는 두 개의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전반부는 와타나베의 시점으로, 후반부는 동료 공무원들의 시점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관객이 단순히 와타나베를 동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삶과 행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와타나베 역을 맡은 배우 시무라 타카시는, 말 수 없는 중년 남성의 감정을 몸짓과 눈빛만으로 표현하며, ‘무언의 철학’을 완성시킨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 떨리는 입술, 고개를 숙인 자세 등은 텍스트로는 설명되지 않는 심리의 파장을 보여준다. 구로사와는 이처럼 배우의 연기를 철학적 표현 수단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일본 민요 ‘곤도리 유레루’는 영화 전반의 주제와 맞물리며, 단조롭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 장면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인간은 삶을 느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잔잔하게 전하며, 관객의 심장을 조용히 울린다.
결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삶
이키루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살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며, 인간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삶은 길이보다 깊이, 지속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전달하며, 관객에게도 “나는 지금 진정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단 한 사람의 삶도 변화할 수 있고, 그 변화는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한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으로 살고 있을까?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이키루를 다시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