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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 철학적분석, 존재론, 관계성

by 지식 마루 2025. 8. 4.

1983년 공개된 나가이 타츠히 감독의 영화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남태평양의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문화적 충돌과 인간성의 회복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데이비드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 타케시 기타노, 톰 콘티 등 세계적인 배우들이 출연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단순한 전쟁 영화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면,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 타자 이해의 한계, 그리고 관계 속에서의 자아 형성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철학, 존재론, 관계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 고전 영화를 다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권력, 타자성, 도덕성 – 전쟁과 철학의 교차점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는 인간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전쟁이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파괴되고, 동시에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셀리어즈와 요노이 대위 사이의 갈등은 단순히 전투를 둘러싼 적대감이 아닌, 철학적 개념인 ‘타자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요노이는 일본 제국주의 체계 안에서 훈련된 전형적인 군인으로, 복종과 명예를 절대적 가치로 여깁니다. 반면, 셀리어즈는 규범과 권위에 저항하며, 상대방을 도발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 구조 속의 개인의 저항성과 연결됩니다. 요노이는 셀리어즈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직면하게 되고, 이 경험은 그에게 철학적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또한, 셀리어즈의 행동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전복시키는 방식과도 유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존엄성을 유지하며, 강자의 논리를 거부합니다. 요노이와 셀리어즈의 대립은 선악의 이분법보다는 각자의 윤리와 신념이 충돌하는 복잡한 철학적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도덕철학 수업에서 사례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화는 이러한 철학적 대립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전쟁 속 존재의 본질,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포로수용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을 촉발시키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 존재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사유해야 합니다. 셀리어즈는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그는 억압과 감시, 비인격화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려 애쓰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에게 포로수용소는 감옥이자 동시에 철학적 각성의 공간입니다. 특히 셀리어즈가 과거의 트라우마 -어릴 적 동생을 지키지 못했던 기억-를 회상하며 자신의 현재 행동을 설명하는 장면은, 인간 존재가 과거의 시간성과 연속성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존재는 단절된 현재의 순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요노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규율과 질서의 상징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셀리어즈에게 느끼는 혼란과 동요를 감추지 못합니다. 그는 셀리어즈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이는 곧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으로 이어집니다. 영화 후반부, 요노이가 셀리어즈를 처형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는 장면은 존재론적 전환의 클라이맥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타자를 통해 자기를 인식하게 되며, 이전의 권위주의적 존재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획득하게 됩니다.


나 너 관계의 형성과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

인문학에서 ‘관계성’은 단순한 인간관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 너' 이론에 따르면, 진정한 인간 관계는 타자를 객체가 아닌 인격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성립됩니다. 이 영화는 다양한 관계를 통해 이 철학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로렌스 소령은 포로와 일본군 사이를 중재하는 인물로,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려는 유일한 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일본인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동료 포로들에게는 연민과 연대를 보여줍니다. 로렌스와 요노이의 관계는 대표적인 ‘나 너’ 관계의 전개를 따릅니다. 처음엔 상명하복의 군대식 관계였지만, 점차 상대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히 요노이가 로렌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로렌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극 중 유일하게 적과 적이 인간으로서 교감한 순간입니다. 이 짧은 대사는 관계의 회복, 인간성의 회복을 상징하며, 부버가 말한 관계의 윤리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셀리어즈와 요노이의 관계는 보다 복잡합니다. 단순한 우정도 적대도 아닌, 상호 간의 감정적 뒤틀림과 내적 투쟁이 얽혀 있습니다. 이 관계는 자아와 타자, 감정과 이성 사이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관계를 통해 어떻게 성장하거나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따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기를 인식하고 변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인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론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는 단지 전쟁과 감정을 묘사한 고전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자아, 철학적 갈등이라는 깊은 주제를 품고 있는 인문학적 텍스트입니다. 인문학 전공자라면, 이 영화를 다시 볼 때 철학적 해석을 통해 더 풍부한 감정과 사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오락이 아닌,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궁극적 메시지를 발견해보시길 바랍니다.